종교에 대한 이야기 / 길희성 규수님 글 (출처 : 한겨례 휴심정)

조화로운 삶 2012. 1. 15. 08:25

출처 : http://well.hani.co.kr/76956

평생 종교 공부를 해 온 사람인데 요즈음 나는 내가 왜 하필 그 많은 학문 가운데서 종교라는 것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살아왔는지 자문해볼 때가 많다. 또 개인적으로도 평생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해 온 사람인데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거기에 소비해왔는지 묻게 된다.

종교라는 것이 매우 복잡다단한 현상이기 때문에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리고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공부해야 할지 늘 고심하게 된다. 한편 관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자기가 정말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과연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순수’한 종교 현상은 없지만 종교를 종교이게끔 하는 게 영성


종교는 인류 역사를 통해 사회, 문화, 도덕, 정치, 경제, 철학 사상, 예술, 건축, 공예 등 삶의 다양한 분야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기에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종교가 부차적 관심이 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순수한’ 종교 현상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언제나 삶의 다양한 활동들과 연계되고 섞이면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의 가장 순수한 면, 종교를 종교이게끔 하며 종교만의 고유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영성일 것이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는 인간은 영성을 지닌 영적 존재로서 어떤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초월적 실재가 인간과 세계를 초월한다고 믿든 아니면 인간의 마음이나 세계에 내재한다고 믿든, 종교는 오감을 통해 외부 세계에 관여하는 감성과 사고 활동을 하는 이성과는 다른 영성이라는 또 하나의 성품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영성을 자각하고 실현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근본 목적이라고 가르친다. 이에 비하면 종교와 관련된 여타 현상과 관심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종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면, 한 종교가 얼마나 많이 영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우리나라 종교계를 보면 회의를 넘어 절망감마저 들 때가 많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대체로 종교생활은 무척 열심인데 정작 영성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 오히려 신앙이 아주 ‘좋고’ 신앙생활에 열성인 사람일수록 영성과는 거리가 멀고 아집, 독선, 편견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를 흔히 본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나 종교생활에 열심인 사람 하면 왠지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나만의 특이한 경우일까?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입에 거품을 물고 얼굴에는 독기마저 품은 듯 열심히 자기 이야기만 하려는 신자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무엇이 두려워 불편한 마음으로 종교에 매달려 살까

여하튼 영성은 고사하고 일반적 상식과 도덕성에도 못 미치는 신자들로 넘쳐나는 것이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이다. 뉴스 매체를 통해 접하는 한국 종교계의 모습은 어떠한가? 온갖 탐욕과 비리가 판을 치며 이권다툼, 교권다툼이 끊이지 않고 심지어 세속의 법정에까지 끌고 가는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을 알면 알수록 과연 정상적인 생각과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종교단체에 몸을 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이 종교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던 중세시대도 아니고 웬만한 사람은 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 문턱에 진입했다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불편한 마음으로 종교에 매달려 사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냥 보기 싫다고 떠나버리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임을 알면서도 답답해서 하는 소리다. 여하튼 우리나라 종교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와 영성이 유리되어 따로 논다는 것이다. 가장 영적이어야 할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영성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새해 벽두부터 우리 종교계를 이렇게 싸잡아 매도할 생각은 없고 또 이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일도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순수한 영성을 지닌 다수의 성직자들과 양식 있는 신도들이 묵묵히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기에 우리 종교계, 우리 사회가 그나마 이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또 어디든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이며 종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고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의 존재 이유 자체가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에게 적어도 평균 이상의 도덕적 수준과 영적 수준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더군다나 종교에 투입되는 엄청난 시간과 물적 자원을 고려해 볼 때 한국종교계는 아무래도 후한 점수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


창시자는 유연한데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억압…종교는 성공이 곧 실패


요즈음 우리 사회와 종교계에 ‘영성’이란 말이 제법 자주 사용되고 있다. 지금 나 자신도 그렇게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영성이라는 다소 모호한 단어가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쓰이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영어의 ‘spirituality’에 해당하는 말이라 여겨지며, 초월적 실재 혹은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서 초월적 시각에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영적 본성 내지 성품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하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소하게 들리던 이 단어가 이제는 퍽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특별히 연구해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저 감으로 느끼기에는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종교’라는 말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 자신의 경우는 그렇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종교라는 말보다 영성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특히 오늘 우리 한국사회에서 ‘종교’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영성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그러할까?


종교는 우선 집단적인 현상인 반면 영성은 개인적이다. ‘나 홀로 종교’란 있을 수 없다. 종교는 집단적이기 때문에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 하며,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도자와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종교도 집단이고 체제인 한 타 집단들로부터 자기를 차별화하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과 제도를 갖추고 신자들을 관리해야 하면 사상과 교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필연적으로 테두리를 긋고 배타성을 띨 수밖에 없다.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한 카리스마적 창시자들은 기성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개혁적이며 사상이나 행동에서 자유롭고 유연하지만,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추종자들이 늘면 각종 규율이 생기고 제도와 체제를 강화하게 된다. 어쩌면 종교는 성공이 곧 실패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초창기 운동이 지녔던 자유로움과 창조성은 사라지고 신도들을 관리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위를 규제하게 되면서 억압적 기제로 작용한다. 이것이 대체로 종교들이 걷는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코스이다. 종교들마다 초창기의 정신과 비전을 선양하면서 개혁을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죽음 고독 허무 불안 소외와의 대면이 되레 본래적인 삶 이끌어


이와 대조적으로 영성이라는 것은 주로 우리의 마음에 관한 것이고 자기 체험적이고 자기 반성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개인적일(personal) 수밖에 없다. 종교가 집단화되고 제도화되면 될수록 종교를 떠받히고 있던 개인의 영성은 진정성과 순수성을 상실하고 관습적이 되며 세태와 타협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의 주류 종교가 되면 될 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란 한 개인이 자신의 고독과 상대하는 것이다.” 라는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은 종교의 사회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 그 반대로 종교란 집단적 흥분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며 한 집단의 사회적 정체성과 결속력을 강화하고 신성화해주는 기재라고 종교사회학자 뒤르켕은 주장한다 - 깊이 새겨볼만 하다.

사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고독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절망의 터널을 홀로 통과해 본 일이 없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갑자기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 인생의 덧없음을 깊이 느껴 본 일이 없거나 초월자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은 단독자로 서 본 경험이 없는 사람, 갑자기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고 세상만사가 모두 무의미하게 보이는 경험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과연 영적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죽음, 고독, 허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 무의미성, 소외감 등은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루 종일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며 세상사에 몰두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과의 대면은 오히려 우리를 비본래적인 삶에서 본래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 영성을 일깨우는 영혼의 음성 혹은 신의 부름과도 같이 우리를 찾아온다.

인간관계에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섞이다 보면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홀로 있다 보면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든다. 영성은 홀로 있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은 일상적 자아, 사회적 자아에 매몰되었던 영적 자아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이다. 영성의 각성과 함양에는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홀로 있을 줄 아는 자만이 남과도 함께 있을 수 있다.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이 때때로 자발적 고독을 선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결국 우리는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것이다.”(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자기성찰을 위한, 생각마저 멈추는 자발적 침묵이 영성 함양의 필수


영성과 고독이 함께 간다면 영성과 침묵도 떼어놓을 수 없는 짝을 이룬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화는 사귐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면서 대화를 거부하거나 대화에 참여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래서도 안 된다. 공연한 오해를 사기가 쉽다. 이와는 달리 고독과 침묵은 같이 가며, 자발적 고독은 사실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다. 물론 침묵이 반드시 말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혼자 있어도 끊임없이 말을 한다. 홀로 있어도 생각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며, 생각은 홀로 하는 말이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침묵은 생각마저 멈추는 무념의 경지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 자신과 홀로의 대화는 타인과의 대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타인과의 대화는 좋든 나쁘든 남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며 자기 체면에 신경을 쓰게 되므로 정직한 대화가 되기 어렵다. 때로는 원치 않는 말이나 불필요한 말도 해야 하며,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서 오해와 다툼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많이 안다는 것을 과시하려 잘 모르는 것까지도 아는 체 하기도 하며, 자기가 옳다는 것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일단 내뱉은 말이 문제가 있음에도 열심히 옹호하려 든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 정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신을 속이려 해도 속이기 어렵고, 내면의 소리를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기 어렵다. 자발적 고독은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며 자발적 침묵은 자발적 자기성찰을 위함이다. 자신에 대한 정직한 성찰 없는 영성이란 있을 수 없다.


묵언의 수행이 영성의 함양에 필수적인 이유는 단지 자기성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영성이 추구하는 초월적 실재, 궁극적 실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불가언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삶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특히 사회/문화적 세계는 언어로 구성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을 식별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통해서 <하나>의 세계를 <여럿>으로 가르고 쪼갠다. 영성이 추구하는 무한한 실재는 유한한 사물이 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이름과 형상, 속성과 특징들을 여이고 텅 빈 고적한 세계이다. 바로 그러기 때문에 이 실재는 대립과 차별의 세계를 넘어 모든 유한한 것들을 품을 수 있고 사물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며 만물을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놓아버리고 자기로부터 도망간 사람이 자기도 얻고 세상도 얻어

그래서 영성은 일차적으로 다수성보다는 단일성, 차별성보다는 무차별성을 선호하며, 일체의 상(像, 相)과 관념들을 초월하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선호한다. 일상의 세계를 무시하는 듯한 이 부정은 그러나 모든 것을 다시 품기 위한 부정이지 단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차별의 세계에 갇혀 대립하고 갈등하는 괴로움을 극복하는 부정이며 초월적 시각에서 세계와 인생을 다시 발견하고 품게 하는 부정이다. 영성이 선호하는 고독, 침묵, 부정은 모두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영성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결코 세계 도피가 아니다. 영성이 도피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 곧 자기 자신 뿐이다. 영성이 혐오하는 것은 세계 자체나 인생 자체가 아니라 이기적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추한 모습뿐이다. 영성의 대가들은 우리가 좁다란 이기적 자아에 매여 있는 한 진정한 행복을 모르며,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매사에 걸려 넘어진다고 말한다. 삭발입산을 해도 소용없고 교회나 수도원을 찾아도 소용없다. 그러나 자기를 놓아버린 자, 진정으로 자기로부터 도망간 사람은 자기도 얻고 세상도 얻는다고 증언한다. 임제선사가 말하는 대로 “처하는 곳마다 주인 노릇 하고 서 있는 곳마다 참된”(隨處作主 立處皆眞) 경지가 열린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지만 영성은 나만이 알고 하느님만이 아는 세계이다. 물론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남에게 보이려는 가식과 위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영성의 세계에서 자기기만이 차지할 공간은 크지 않다. 종교는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사상의 통일이 필요하기에 교리에 대한 동의를 요구하지만, 영성에는 강요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과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집단적 동질성을 요구하는 종교는 때때로 철저한 영성가들의 정직한 말과 행동을 위험시하지만, 영성적 관점에서 보면 종교는 순수성을 상실한 타협 아니면 타락으로 보인다. 개인적 영성을 바탕으로 하여 출발한 종교는 집단화되는 순간부터 순수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영성을 키우기는커녕 장애가 되기 쉽다. 종교는 일정한 경계와 울타리를 치고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의 차이와 자유에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고 자발성과 진정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성찰을 본질로 하는 영성에는 항시 정직성과 진정성이 살아 있으며, 이러한 영성이 살아 있는 한 종교도 생명력을 지니며 자체를 정화하고 개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반면에 영성이 억압받고 고갈된 종교는 아무리 덩치가 커도 거대한 시체 덩어리나 다름없다.

종교는 영성은 본래 반드시 같이 가야하며 그 사명은 영성을 일깨우는 것


개인의 끝없는 정직성과 진정성을 요구하는 영성은 쉽게 교리나 도그마에 가둘 수가 없다. 영성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내적 경험이다. 교단이나 교권은 개인의 영성을 규제하고 획일화하기 원하지만 어떤 종교도 완전히 성공할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완전히 성공하는 순간 그 종교는 망한다. 종교와 영성의 완전한 일치는 본질상 불가능하며, 양자 사이의 창조적 긴장은 종교 자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종교는 체제 유지를 위해 정치권력과 유착하기도 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하며 때로는 전쟁을 부추기지만,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영성은 권력이나 부와는 거리가 멀다. 종교는 교리를 정립하고 정통을 수호하려고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지만, 영성은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성찰하며 물리적 힘에 의존하기보다는 자기 비움을 우선시하며, 우리와 저들을 가르기 전에 모두를 하나로 감싸 안는다. 종교 지도자들은 때때로 하느님의 뜻을 들먹이면서 집단적 이기주의를 부추기고 성전(聖戰)을 독려하지만, 영성가는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집단적 광기에 휩싸이지 않는다. 종교는 종종 전쟁의 원인이 되지만 진정한 성전(jihad)은 오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뿐이라고 이슬람의 수피 영성가들은 말한다. 종교는 빠지면 빠질수록 위험하지만 영성은 깊으면 깊을수록 자유롭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종교를 지나치게 폄하하고 영성을 무비판적으로 미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부터 어떤 의도성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의도성은 종교를 비판하고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증폭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종교를 옹호하려는 데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종교와 영성을 지나치게 차별화한 것은 사실은 종교와 영성이 동일시됨으로써 행여 영성이라는 진주가 종교라는 진흙에 묻혀서 함께 외면당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영성은 본래 반드시 같이 가야하며, 종교의 목적과 사명은 어디까지나 각 사람의 영성을 일깨우고 함양하는 데 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영성은 실제로 특정한 종교 전통들 속에서 함양되어 왔다. 하지만 강력하고 순수한 영적 운동으로 시작한 종교들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전통의 무게가 더해지고 제도가 공고해지면 ‘정통’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양심을 짓누르고 영적 진정성을 훼손하는 기재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에는 영성 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한 종교를 절대화하지 않고 비종교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제3의 영성

순수한 영성 운동도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제도화 되고 권력화 된다. 동서양 수도원의 역사가 이를 보여주며 오늘날도 많은 수도 단체들이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수도원도 개혁 운동이 필요하며, 스님들 가운데는 절을 떠나 토굴에서 수행하는 제2의 출가를 감행하기도 한다. 종교도 처음에는 순수한 영성운동으로 출발했다는 사실, 종교 안과 밖에서 출발한 각종 영성운동도 ‘성공’에 비례하여 종교의 길을 가게 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종교와 영성의 차이를 결코 과장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종교는 본성상 집단적이고 영성은 본성상 개인적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타당하다.


개인의 발견과 더불어 주체적 인간이 출현하는 근현대 세계로 들어오면서 종교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라는 의식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현대인들에 의해 외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는 외면당할지언정 인간의 영성이 사라지거나 무시되는 일은 없다. 영성이 감성이나 이성과 더불어 인간 본성의 일면인 한, 현대인이라고 해서 영성을 외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오히려 종교의 전통과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짐에 따라 다종교적 영성, 초종교적 영성, 또는 비종교적 영성을 키울 수 있는 공전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종교 간의 벽을 넘고 종교와 비종교의 구별마저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을 회복하고 실현할 수 있는 초유의 기회를 누리게 된 것이다.

현대인들은 제도 종교들이 더 이상 인간의 의식을 지배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영적 공허 속에 방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영적 실험을 하면서 이전 시대의 인간들이 누려보지 못했던 영적 자유와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종교를 넘어 영성으로, 한 종교에 갇혔던 시야를 벗어나 인류 전체의 영적 자산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현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나는 이것을 ‘제삼의 영적 세계’라고 부르고 싶다. 한 종교의 언어와 전통에 사로잡혀 절대화하지 않는 영성,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세속주의도 아닌 영성, 나아가서 종교와 비종교 - 성과 속, 진과 속 - 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비종교적 영성이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서구 사회들의 경우 이러한 초종교 영성은 동양 종교들에 대한 관심 혹은 환경/생태적 영성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서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대형 서점의 종교 서적 코너를 한 번 방문해 보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동양종교들에 대한 책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만큼 수요가 있기에 출간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고등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의 의식 수준은 이제 더 이상 한 종교에 묶일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단단히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갑자기 무장해제 되는 순간 영적 눈 뜨여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 지독한 종교적 배타주의의 목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린다 해도, 침묵하는 다수의 의식 속에는 종교란 결국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생각이 일반화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교들은 길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일종의 직관적 종교다원주의론을 펴기도 한다.


영적 인간관에 의하면 영성은 우리 마음 속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인간 본연의 심성이다. 인간이 인간인 한 대면해야 하고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성 그 자체에 속한다. 표피적 자아 아래 숨겨진 심층적 자아, 영적 자아, 참 자아(진아)와의 대면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겹겹으로 단단히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갑자기 무장해제 되는 순간 영적 눈이 뜨인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개안의 경험을 돈오(頓悟)라고 부른다. 선에만 돈오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유사한 영적 체험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며, 종교와 특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욕심이 만든 허상에서 벗어나 세계와 인생의 실상을 보게 되며 자기 존재의 참다운 가치를 발견한다. 소유보다 존재에, 성취보다 살아 있음에 더 큰 행복을 느끼며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되어야 할 자기와 현실적 자기, 본래적 자기와 비본래적 자기, 본질과 실존의 괴리 속에서 괴로워한다. 부처와 예수, 공자나 노자 같은 성인은 이러한 괴리와 소외를 완전히 극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터운 표피적 자아를 뚫고 들어가 영혼의 심층에 깔려 있는 깊은 자아를 만나 거기로부터 사는 진정한 사람들이다. 이 심층적 자아는 이런 저런 우연적 특성을 지닌 표피적 자아, 끊임없이 경쟁하고 갈등하는 차별적 자아가 아니라 무차별적 자아, 순수한 자아, 보편적 자아, 초월적 자아로서 만인을 품을 수 있고 만물과 하나 되는 우주적 자아이며 하느님과 하나 되는 신적 자아이다.

수행이든 은총이든 영성의 핵심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벗어나는 것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의 현실적 모습을 거부하도록 추동하는 자아로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 혹은 씨앗, 하늘로부터 품수 받은 천성, 부처의 성품, 아트만, 내면의 빛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영성의 세계에서는 하느님과의 대면은 곧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며 자기를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길이다. 영성의 완전한 실현은 하늘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인 천인합일(天人合一) 또는 신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인 신화 혹은 신인합일(神人合一)이다. 이렇게 우주와 하나 되고 신과 하나 되며 부처와 하나 되는 영성이야말로 인간의 지고선이며 존엄성의 진정한 근거이다. 그리고 영성이 인간의 본성인 한, 영성의 자각과 실현은 곧 참다운 인간이 되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일치의 경지는 죄악으로 덮여 있는 범부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비적 일치의 영성보다는 초월적 타자로부터 오는 은총에서 인간의 희망을 보는 신앙적 영성도 있다. 이른바 ‘타력’ 신앙적 영성으로서, 자신의 노력과 수행으로 자기의 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성에서 자력과 타력의 구별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영성의 세계에 ‘자력’의 오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행이든 은총이든 영성의 핵심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벗어나는 데 있다. 자기포기 없이 은총은 주어지지 않으며 은총의 도움 없이 자기초월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은총을 은총으로 깨닫는 것은 영성이며, 영성이 일깨워지는 계기는 은총으로 주어지고 영성의 완성 또한 자신의 힘보다는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참 인간’(ein wahrer Mensch)이라고 부르는 사람, 임제 선사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떤 모습의 사람일까? 욕심이 없으니 다툴 일이 없고, 소유하지 않으니 잃을 것이 없으며, 잃을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다. 성과 속, 진과 속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으며 언제나 자유롭다. 성직자들처럼 유별난 복장을 하지 않으며 특별히 근엄한 행동을 하거나 이상한 말투로 말하지도 않는다. 상식을 무시하지 않으며 권위로 자신을 포장하지도 않는다.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으며 목에 힘주는 일이 없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 물처럼 부드럽고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되 슬픔과 기쁨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많은 것을 알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부지런히 일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모든 것을 누리지만 하나도 소유하지는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영성을 사랑하는 자들이 흠모하는 참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길희성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다드는 통찰력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을,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서강대 명예교수. 한완상 박사 등과 대안교회인 새길교회를 이끌었고, 최근엔 사재를 털어 강화도에 고전을 읽고 명상을 할 수 있는 ‘도를 찾는 공부방’이란 뜻의 심도(cafe.daum.net/simdohaksa)학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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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투잡스’, 직장인 저술가로 사는 법

관심기사 2011. 5. 9. 17:06
펀글 : 시사IN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35

정범준씨(필명·41)는 회사원이다. 그리고 저술가다. 하이닉스반도체 홍보팀에서 일하며 책을 쓰고, 책을 쓰며 일한다. 2006년에 첫 책 <제국의 후예들>을 펴냈다. 조선 왕실 후예들의 삶을 다룬 책이다.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서 쓰게 되었다. 컴퓨터 앞에 앉는 일은 여전히 두려웠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료를 모으고 책의 구성에 골몰하는 것이 마냥 좋고 즐거웠다. 언뜻 ‘이것이 나의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첫 책을 낸 이후로 정씨는 해마다 책을 한 권씩 펴냈다. 2007년에는 언론인 단체 관훈클럽을 통해 한국 언론사를 짚은 <이야기 관훈클럽>을 출판했다. 2008년에는 정씨가 가장 아낀다는 <거인의 추억>을 세상에 내놓았다. 야구 선수 ‘최동원 평전’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야구 선수들 이름을 줄줄 외운 야구 소년이었다. 롯데자이언츠 창단 어린이 회원이었던 것을 지금도 자랑으로 여긴다. 첫 책을 내기 전부터 이미 최동원 선수의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009년에는 소설가 이병주 평전 <작가의 탄생>을 썼다. 이병주의 소설 <관부 연락선>을 읽고 나서 ‘이병주 월드’에 빠져들었다. 이병주가 쓴 글이라면 사보에 실린 칼럼까지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 지난해 <마흔, 마운드에 서다>를 상재했다. 사회인 야구를 시작하면서 틈틈이 기록해둔 야구팀 이야기를 논픽션으로 썼다. 각기 다른 주제의 책을 해마다 써내는 사람. 정범준씨는 ‘직장인 저술가’이다.     


   
ⓒ조우혜
정범준씨는 주말에는 야구를 하고, 주중 저녁에는 살사 동호회에 나가 춤을 배운다.


취재 약속을 잡기 위해 그에게 전화를 했다. 월요일·수요일·목요일은 퇴근 후에 살사 연습을 하러 홍대 쪽으로 가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사회인 야구 시합이 잡혀 있다고 했다. 세상에, 글만 쓰는 게 아니라 살사까지! “뭐든지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지난해 3월부터 다음 카페 살사 동호회 ‘보스톤’에서 살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정범준씨, 해마다 한 권씩 42권 집필이 목표

“살사를 꼭 배워보고 싶었다. 살사가 꽤 어려워 몇 개월을 해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그래서 1주일에 무조건 2회 이상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성실(誠實)의 ‘성’자가 말씀 언(言)과 이룰 성(成)으로 만들어졌다. 말하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 시절부터 그를 잘 아는 출판사 알렙의 조영남 대표는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학창 시절에 만난 친구 삼총사의 이름 가운데 한 글자씩 따서 필명을 정했다. 대학 시절 노래패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학교 생활은 심드렁했다. 단편소설을 써서 대학 문학상을 받기도 했지만, 글을 계속 쓸지는 자신하지 못했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졸업 이후 취업이 쉽지 않았다. 3년을 놀았다. 부산으로 내려가 산에서 산불 감시하는 ‘공공 근로’를 하기도 했다. 2000년에 한 IT 잡지사에 취직했고, 그때부터 1년6개월쯤 일하고 두세 달 노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한다. 옮기는 직장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좋았다.


   
정범준씨(위)는 뭔가 ‘필’이 오면 전력질주한다. 야구도 그렇게 시작했다.정범준씨, 무엇을 썼나?<제국의 후예들> <이야기 관훈클럽> <거인의 추억> <작가의 탄생> <마흔, 마운드에 서다>


한 출판사의 의뢰로 첫 책을 내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좋아서 하는 일, 즐겨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심했다. 해마다 책 한 권씩 쓰자고. 목표도 정했다. 42권을 쓰는 거다. 마라톤 42.195㎞를 뛰듯이. 그는 논픽션 작가로 유명해지면 한 해에 두 권씩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생 책 한 권을 못 쓰는 사람도 많은데, 그는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할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시간 여유가 있는 편이다. 평소에 자료를 틈틈이 모은다. 자료를 보다보면 쓰고 싶은 책 주제가 이어져 나온다. 자료를 모으고 나서는 대략 3개월 동안 글을 쓴다. 주로 겨울철에 글을 쓴다.”

왜 겨울철에 글을 쓰냐고? 겨울에는 야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야구 마니아이다. 야구를 보는 게 취미였다. 2008년 가을부터 사회인 야구에 뛰어들었다. 그가 책에 쓴 한 대목은 이렇다. “그때 내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마흔을 앞둔 사내의 즐거움이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뭔가 설레고 울렁거리게 하는 일, 그러면서 즐거움과 행복함을 주는 일은 과연 없을까. 인생에서도 성적 오르가슴 같은, 그러니까 엑스터시를 느끼게 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 야구를 시작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다고 한다. 마운드에 서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는 뭔가 ‘필이 오면’ 그 길로 전력 질주한다. 10개월 동안 퇴근하고 나면 일주일에 두 차례씩 야구 교실로 가서 투수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마운드에 올랐다. 그는 토요팀 ‘터틀즈’에서 투수로 활약하고, 일요팀 ‘K드래곤즈’에서는 1루수로 나선다. 야구를 배우면서 틈틈이 야구 일기를 썼다. <마흔, 마운드에 서다>는 그 튼실한 부산물이다.   

정범준씨에게만 시간이 하루 48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흔히 마음은 있는데 사는 게 바빠서라는 말을 하지만, 마음만 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내게는 약간 ‘맹구 기질’이 있다. 봉숭아학당의 맹구가 ‘저요, 저요’ 하고 손들면 다른 사람들은 다 손을 내려야 하지 않는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일이라면 남들보다는 내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한다는 ‘티’를 내고 싶다. 그걸 열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구나 살사, 책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마음과 열정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

한 해에 책 한 권씩 쓰는 직장인 저술가. 마라톤 뛰듯이 42권을 쓰겠다는 정범준씨. 대화하는 중에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책 주제들이 줄줄 이어졌다. TBC, 삼양라면, 영창피아노, 5·16 쿠데타 이후의 풍경 등등. 열정과 호기심은 그의 ‘페이스 메이커’였다.


   
ⓒ시사IN 윤무영
신인철씨(위)는 토요일 오전에 미리 정리한 자료를 토대로 4시간씩 글을 쓴다. 신인철씨, 무엇을 썼나?<토요일 4시간> <레이체스터 이야기> <럭셔리 마이 백> <굿바이 핑계> <직장생활에서 놓쳐서는 안 될 33가지 기회> <마법의 지갑> <팔로워십, 리더를 만드는 힘> <핑계> <영웅들의 전쟁> <공대리 성공시대> <황금안경> <부자 신사와 달걀 하나>
신인철씨 ‘자랑스러운 마마보이’ 자처


신인철 LG생명과학 홍보팀 과장(35)도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파’이다. 대학에서 한문학을 전공한 신씨도 배우는 일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자랑스러운 마마보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교육열이 높았다. 국·영·수 학원을 뺑뺑이 돌리는 그런 교육열이 아니다. 부모는 무슨 일이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좋다고 여겼다. 초등학교 때부터 무술을 배웠다. 태권도 1단, 합기도 1단을 땄다. 검도도 배웠다.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익혔다. 독주가 가능할 정도로. 중학교 때는 전자 오르간을 독학으로 배웠다.

대학 시절에는 레크리에이션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축제 사회자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레크리에이션 아르바이트와 멸치 상자 나르기 등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고, 방학 때면 해외를 돌아다녔다. 30개국. 남들이 잘 모르는 곳, 낯선 곳을 찾아가는 일이 즐거웠다.

고등학교 때 글쓰기대회에서 연거푸 상을 받을 정도로 글 솜씨가 있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이렇게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목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군대 시절부터 그는 MBA 유학이 목표였다. 취미로 유화를 그리던 장교 시절, 틈틈이 어학을 공부했다. 2002년 초 취업을 하고서 ‘주경야독’했다. 퇴근하고 나서 일찍 잠자리에 들고, 밤 1시에 일어나 MBA 준비를 했다. 새벽까지 내처 토플 등 어학 공부를 하고, 곧장 강남에 있는 어학원으로 가서 첫 수업을 두 시간씩 들었다. 그리고 출근. 그렇게 1년6개월을 보냈다. 빡빡한 스케줄로 생활이 황폐해지더란다. 그래도 그에게는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그는 모르는 것은 묻는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의외로 많은 이들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다른 이에게 묻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MBA를 준비하면서 해외 대학의 입학사정관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어학이 모자라긴 하지만 네 열정이 놀랍다. 들어오면 칼리지에서 어학 코스를 빨리 끝내고 입학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즈음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졌고, 유학을 포기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나, 싶었지만 금세 툭툭 털고 일어섰다. 경영학을 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필립 코틀러·프리드만·크루그먼·루빈 교수 등 이메일 주소를 알 수 있는 해외 학자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나를 소개한 다음 ‘당신의 어떤 책을 보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책을 추천해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어떤 이는 책 목록을 보내오기도 했고, 어떤 이는 참고할 PDF 파일을 첨부해 보내왔다. 밤마다 해외 학자들로부터 추천받은 원서와 번역본을 읽으며 독학했다. 1년6개월 정도 공부를 했더니 흐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자기가 공부한 것을 꼼꼼히 정리했고, 그 노트를 바탕으로 틈틈이 글을 썼다. 2004년 9월에 첫 책을 냈다. 지금까지 그는 경제경영 분야의 자기계발서 열두 권을 썼다. 세 권은 홍콩, 타이완에서 번역·출간되기도 했다.

열심히 할 때의 희열, 마무리할 때의 쾌감 커

신인철씨는 사내에서 직장인 문화예술 모임인 ‘르네상스 워커스’를 제안해 활동하고 있다. “농부가 농사를 지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사무원이 일을 하면서 음악을 했으면 좋겠다. 스페셜리스트보다는,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르네상스형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토요일마다 종로에 있는 전수소에 가서 가야금을 배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신씨가 최근에 낸 <토요일 4시간>은 서점에서 반응이 좋은 편이다. 틈새 시간과 토요일을 활용하자는 그의 소박한 제안에 공감하는 이가 많다. 그는 항상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노트북으로 자료를 정리한다. 자료용으로, 집필용으로 노트북 3대와 데스크톱 1대를 사용한다. 토요일 아침 8시에는 집 근처 커피숍으로 간다. 평일 퇴근 이후에 공부하거나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토요일 오전에 4시간 동안 책을 쓴다. 낮 12시쯤 집에 들어가 아내와 청소를 하고 9개월 된 아이를 돌본다. 책이 한 권, 두 권 나오는 걸 보면서 신씨의 작업에 대한 가족의 이해도 깊어졌다. 어머니는 신인철씨가 새 책을 낼 때마다 즐거워한다. 전업주부인 아내도 토요일 오전 신씨의 외출을 양해한다.

직장 동료들도 그가 책을 쓰는 것에 신기해한다. 그가 빡빡한 회사 일을 하면서 책을 내는 것을 보며 간혹 ‘누군가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직장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시간을 이렇게 촘촘하게 쓰는 것. 혹시 피곤하지 않을까. “느긋한 삶도 그 나름의 기쁨이 있겠지만 나는 좋아서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데에서 희열을 느낀다. 글 쓰면서 하는 고민만큼이나 마무리했을 때의 쾌감이 크다.” 그리고 그가 덧붙이는 한마디. “벼슬을 안 한 사람들의 제문에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라고 적지 않나? 학생이라는 말을 붙인 데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평생 공부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천생 ‘직장인 저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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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란 무엇인가?

조화로운 삶 2011. 2. 23. 13:27

성공이란 무엇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로부터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알아보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하나의 다른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펀글 : http://hook.hani.co.kr/archives/22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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