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운 삶'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2.08.28 수행
  2. 2012.01.15 종교에 대한 이야기 / 길희성 규수님 글 (출처 : 한겨례 휴심정)
  3. 2011.02.23 성공이란 무엇인가?
  4. 2008.02.13 옛글
  5. 2008.02.03 꽃섬, 라스트 파라다이스
  6. 2008.01.31 고독과 고립
  7. 2008.01.31 불우한 자들이 낙원을 만들고 모든 낙원은 지옥속의 낙원이다
  8. 2008.01.31 Life is (인생이란)
  9. 2008.01.31 Find your center, Like a Dharma Toy
  10. 2008.01.31 Interview with GOD (신과의 인터뷰)

수행

조화로운 삶 2012. 8. 28. 10:36

부처님께서 제1의 화살을 맞을지언정 제2의 화살은 맞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날 불가항력적으로 나한테 닥친 사건이 제1의 화살입니다. 그 사건은 그것으로 이미 끝나버렸는데 그것을 상처로 삼아서 제2, 제3의 문제를 계속 일을 일으키면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내 운명이 돼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런 제1의 화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게 사회변화라면, 설령 제1의 화살을 맞았더라도 제2, 제3의 화살이 맞지 않도록 하는 게 내 수행입니다

 

- 법륜스님 글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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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대한 이야기 / 길희성 규수님 글 (출처 : 한겨례 휴심정)

조화로운 삶 2012. 1. 15. 08:25

출처 : http://well.hani.co.kr/76956

평생 종교 공부를 해 온 사람인데 요즈음 나는 내가 왜 하필 그 많은 학문 가운데서 종교라는 것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살아왔는지 자문해볼 때가 많다. 또 개인적으로도 평생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해 온 사람인데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거기에 소비해왔는지 묻게 된다.

종교라는 것이 매우 복잡다단한 현상이기 때문에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리고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공부해야 할지 늘 고심하게 된다. 한편 관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자기가 정말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과연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순수’한 종교 현상은 없지만 종교를 종교이게끔 하는 게 영성


종교는 인류 역사를 통해 사회, 문화, 도덕, 정치, 경제, 철학 사상, 예술, 건축, 공예 등 삶의 다양한 분야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기에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종교가 부차적 관심이 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순수한’ 종교 현상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언제나 삶의 다양한 활동들과 연계되고 섞이면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의 가장 순수한 면, 종교를 종교이게끔 하며 종교만의 고유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영성일 것이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는 인간은 영성을 지닌 영적 존재로서 어떤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초월적 실재가 인간과 세계를 초월한다고 믿든 아니면 인간의 마음이나 세계에 내재한다고 믿든, 종교는 오감을 통해 외부 세계에 관여하는 감성과 사고 활동을 하는 이성과는 다른 영성이라는 또 하나의 성품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영성을 자각하고 실현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근본 목적이라고 가르친다. 이에 비하면 종교와 관련된 여타 현상과 관심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종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면, 한 종교가 얼마나 많이 영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우리나라 종교계를 보면 회의를 넘어 절망감마저 들 때가 많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대체로 종교생활은 무척 열심인데 정작 영성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 오히려 신앙이 아주 ‘좋고’ 신앙생활에 열성인 사람일수록 영성과는 거리가 멀고 아집, 독선, 편견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를 흔히 본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나 종교생활에 열심인 사람 하면 왠지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나만의 특이한 경우일까?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입에 거품을 물고 얼굴에는 독기마저 품은 듯 열심히 자기 이야기만 하려는 신자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무엇이 두려워 불편한 마음으로 종교에 매달려 살까

여하튼 영성은 고사하고 일반적 상식과 도덕성에도 못 미치는 신자들로 넘쳐나는 것이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이다. 뉴스 매체를 통해 접하는 한국 종교계의 모습은 어떠한가? 온갖 탐욕과 비리가 판을 치며 이권다툼, 교권다툼이 끊이지 않고 심지어 세속의 법정에까지 끌고 가는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을 알면 알수록 과연 정상적인 생각과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종교단체에 몸을 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이 종교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던 중세시대도 아니고 웬만한 사람은 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 문턱에 진입했다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불편한 마음으로 종교에 매달려 사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냥 보기 싫다고 떠나버리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임을 알면서도 답답해서 하는 소리다. 여하튼 우리나라 종교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와 영성이 유리되어 따로 논다는 것이다. 가장 영적이어야 할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영성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새해 벽두부터 우리 종교계를 이렇게 싸잡아 매도할 생각은 없고 또 이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일도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순수한 영성을 지닌 다수의 성직자들과 양식 있는 신도들이 묵묵히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기에 우리 종교계, 우리 사회가 그나마 이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또 어디든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이며 종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고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의 존재 이유 자체가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에게 적어도 평균 이상의 도덕적 수준과 영적 수준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더군다나 종교에 투입되는 엄청난 시간과 물적 자원을 고려해 볼 때 한국종교계는 아무래도 후한 점수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


창시자는 유연한데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억압…종교는 성공이 곧 실패


요즈음 우리 사회와 종교계에 ‘영성’이란 말이 제법 자주 사용되고 있다. 지금 나 자신도 그렇게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영성이라는 다소 모호한 단어가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쓰이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영어의 ‘spirituality’에 해당하는 말이라 여겨지며, 초월적 실재 혹은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서 초월적 시각에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영적 본성 내지 성품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하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소하게 들리던 이 단어가 이제는 퍽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특별히 연구해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저 감으로 느끼기에는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종교’라는 말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 자신의 경우는 그렇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종교라는 말보다 영성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특히 오늘 우리 한국사회에서 ‘종교’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영성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그러할까?


종교는 우선 집단적인 현상인 반면 영성은 개인적이다. ‘나 홀로 종교’란 있을 수 없다. 종교는 집단적이기 때문에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 하며,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도자와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종교도 집단이고 체제인 한 타 집단들로부터 자기를 차별화하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과 제도를 갖추고 신자들을 관리해야 하면 사상과 교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필연적으로 테두리를 긋고 배타성을 띨 수밖에 없다.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한 카리스마적 창시자들은 기성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개혁적이며 사상이나 행동에서 자유롭고 유연하지만,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추종자들이 늘면 각종 규율이 생기고 제도와 체제를 강화하게 된다. 어쩌면 종교는 성공이 곧 실패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초창기 운동이 지녔던 자유로움과 창조성은 사라지고 신도들을 관리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위를 규제하게 되면서 억압적 기제로 작용한다. 이것이 대체로 종교들이 걷는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코스이다. 종교들마다 초창기의 정신과 비전을 선양하면서 개혁을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죽음 고독 허무 불안 소외와의 대면이 되레 본래적인 삶 이끌어


이와 대조적으로 영성이라는 것은 주로 우리의 마음에 관한 것이고 자기 체험적이고 자기 반성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개인적일(personal) 수밖에 없다. 종교가 집단화되고 제도화되면 될수록 종교를 떠받히고 있던 개인의 영성은 진정성과 순수성을 상실하고 관습적이 되며 세태와 타협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의 주류 종교가 되면 될 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란 한 개인이 자신의 고독과 상대하는 것이다.” 라는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은 종교의 사회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 그 반대로 종교란 집단적 흥분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며 한 집단의 사회적 정체성과 결속력을 강화하고 신성화해주는 기재라고 종교사회학자 뒤르켕은 주장한다 - 깊이 새겨볼만 하다.

사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고독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절망의 터널을 홀로 통과해 본 일이 없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갑자기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 인생의 덧없음을 깊이 느껴 본 일이 없거나 초월자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은 단독자로 서 본 경험이 없는 사람, 갑자기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고 세상만사가 모두 무의미하게 보이는 경험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과연 영적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죽음, 고독, 허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 무의미성, 소외감 등은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루 종일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며 세상사에 몰두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과의 대면은 오히려 우리를 비본래적인 삶에서 본래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 영성을 일깨우는 영혼의 음성 혹은 신의 부름과도 같이 우리를 찾아온다.

인간관계에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섞이다 보면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홀로 있다 보면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든다. 영성은 홀로 있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은 일상적 자아, 사회적 자아에 매몰되었던 영적 자아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이다. 영성의 각성과 함양에는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홀로 있을 줄 아는 자만이 남과도 함께 있을 수 있다.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이 때때로 자발적 고독을 선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결국 우리는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것이다.”(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자기성찰을 위한, 생각마저 멈추는 자발적 침묵이 영성 함양의 필수


영성과 고독이 함께 간다면 영성과 침묵도 떼어놓을 수 없는 짝을 이룬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화는 사귐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면서 대화를 거부하거나 대화에 참여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래서도 안 된다. 공연한 오해를 사기가 쉽다. 이와는 달리 고독과 침묵은 같이 가며, 자발적 고독은 사실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다. 물론 침묵이 반드시 말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혼자 있어도 끊임없이 말을 한다. 홀로 있어도 생각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며, 생각은 홀로 하는 말이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침묵은 생각마저 멈추는 무념의 경지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 자신과 홀로의 대화는 타인과의 대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타인과의 대화는 좋든 나쁘든 남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며 자기 체면에 신경을 쓰게 되므로 정직한 대화가 되기 어렵다. 때로는 원치 않는 말이나 불필요한 말도 해야 하며,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서 오해와 다툼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많이 안다는 것을 과시하려 잘 모르는 것까지도 아는 체 하기도 하며, 자기가 옳다는 것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일단 내뱉은 말이 문제가 있음에도 열심히 옹호하려 든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 정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신을 속이려 해도 속이기 어렵고, 내면의 소리를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기 어렵다. 자발적 고독은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며 자발적 침묵은 자발적 자기성찰을 위함이다. 자신에 대한 정직한 성찰 없는 영성이란 있을 수 없다.


묵언의 수행이 영성의 함양에 필수적인 이유는 단지 자기성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영성이 추구하는 초월적 실재, 궁극적 실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불가언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삶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특히 사회/문화적 세계는 언어로 구성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을 식별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통해서 <하나>의 세계를 <여럿>으로 가르고 쪼갠다. 영성이 추구하는 무한한 실재는 유한한 사물이 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이름과 형상, 속성과 특징들을 여이고 텅 빈 고적한 세계이다. 바로 그러기 때문에 이 실재는 대립과 차별의 세계를 넘어 모든 유한한 것들을 품을 수 있고 사물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며 만물을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놓아버리고 자기로부터 도망간 사람이 자기도 얻고 세상도 얻어

그래서 영성은 일차적으로 다수성보다는 단일성, 차별성보다는 무차별성을 선호하며, 일체의 상(像, 相)과 관념들을 초월하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선호한다. 일상의 세계를 무시하는 듯한 이 부정은 그러나 모든 것을 다시 품기 위한 부정이지 단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차별의 세계에 갇혀 대립하고 갈등하는 괴로움을 극복하는 부정이며 초월적 시각에서 세계와 인생을 다시 발견하고 품게 하는 부정이다. 영성이 선호하는 고독, 침묵, 부정은 모두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영성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결코 세계 도피가 아니다. 영성이 도피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 곧 자기 자신 뿐이다. 영성이 혐오하는 것은 세계 자체나 인생 자체가 아니라 이기적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추한 모습뿐이다. 영성의 대가들은 우리가 좁다란 이기적 자아에 매여 있는 한 진정한 행복을 모르며,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매사에 걸려 넘어진다고 말한다. 삭발입산을 해도 소용없고 교회나 수도원을 찾아도 소용없다. 그러나 자기를 놓아버린 자, 진정으로 자기로부터 도망간 사람은 자기도 얻고 세상도 얻는다고 증언한다. 임제선사가 말하는 대로 “처하는 곳마다 주인 노릇 하고 서 있는 곳마다 참된”(隨處作主 立處皆眞) 경지가 열린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지만 영성은 나만이 알고 하느님만이 아는 세계이다. 물론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남에게 보이려는 가식과 위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영성의 세계에서 자기기만이 차지할 공간은 크지 않다. 종교는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사상의 통일이 필요하기에 교리에 대한 동의를 요구하지만, 영성에는 강요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과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집단적 동질성을 요구하는 종교는 때때로 철저한 영성가들의 정직한 말과 행동을 위험시하지만, 영성적 관점에서 보면 종교는 순수성을 상실한 타협 아니면 타락으로 보인다. 개인적 영성을 바탕으로 하여 출발한 종교는 집단화되는 순간부터 순수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영성을 키우기는커녕 장애가 되기 쉽다. 종교는 일정한 경계와 울타리를 치고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의 차이와 자유에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고 자발성과 진정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성찰을 본질로 하는 영성에는 항시 정직성과 진정성이 살아 있으며, 이러한 영성이 살아 있는 한 종교도 생명력을 지니며 자체를 정화하고 개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반면에 영성이 억압받고 고갈된 종교는 아무리 덩치가 커도 거대한 시체 덩어리나 다름없다.

종교는 영성은 본래 반드시 같이 가야하며 그 사명은 영성을 일깨우는 것


개인의 끝없는 정직성과 진정성을 요구하는 영성은 쉽게 교리나 도그마에 가둘 수가 없다. 영성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내적 경험이다. 교단이나 교권은 개인의 영성을 규제하고 획일화하기 원하지만 어떤 종교도 완전히 성공할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완전히 성공하는 순간 그 종교는 망한다. 종교와 영성의 완전한 일치는 본질상 불가능하며, 양자 사이의 창조적 긴장은 종교 자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종교는 체제 유지를 위해 정치권력과 유착하기도 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하며 때로는 전쟁을 부추기지만,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영성은 권력이나 부와는 거리가 멀다. 종교는 교리를 정립하고 정통을 수호하려고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지만, 영성은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성찰하며 물리적 힘에 의존하기보다는 자기 비움을 우선시하며, 우리와 저들을 가르기 전에 모두를 하나로 감싸 안는다. 종교 지도자들은 때때로 하느님의 뜻을 들먹이면서 집단적 이기주의를 부추기고 성전(聖戰)을 독려하지만, 영성가는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집단적 광기에 휩싸이지 않는다. 종교는 종종 전쟁의 원인이 되지만 진정한 성전(jihad)은 오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뿐이라고 이슬람의 수피 영성가들은 말한다. 종교는 빠지면 빠질수록 위험하지만 영성은 깊으면 깊을수록 자유롭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종교를 지나치게 폄하하고 영성을 무비판적으로 미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부터 어떤 의도성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의도성은 종교를 비판하고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증폭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종교를 옹호하려는 데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종교와 영성을 지나치게 차별화한 것은 사실은 종교와 영성이 동일시됨으로써 행여 영성이라는 진주가 종교라는 진흙에 묻혀서 함께 외면당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영성은 본래 반드시 같이 가야하며, 종교의 목적과 사명은 어디까지나 각 사람의 영성을 일깨우고 함양하는 데 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영성은 실제로 특정한 종교 전통들 속에서 함양되어 왔다. 하지만 강력하고 순수한 영적 운동으로 시작한 종교들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전통의 무게가 더해지고 제도가 공고해지면 ‘정통’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양심을 짓누르고 영적 진정성을 훼손하는 기재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에는 영성 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한 종교를 절대화하지 않고 비종교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제3의 영성

순수한 영성 운동도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제도화 되고 권력화 된다. 동서양 수도원의 역사가 이를 보여주며 오늘날도 많은 수도 단체들이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수도원도 개혁 운동이 필요하며, 스님들 가운데는 절을 떠나 토굴에서 수행하는 제2의 출가를 감행하기도 한다. 종교도 처음에는 순수한 영성운동으로 출발했다는 사실, 종교 안과 밖에서 출발한 각종 영성운동도 ‘성공’에 비례하여 종교의 길을 가게 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종교와 영성의 차이를 결코 과장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종교는 본성상 집단적이고 영성은 본성상 개인적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타당하다.


개인의 발견과 더불어 주체적 인간이 출현하는 근현대 세계로 들어오면서 종교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라는 의식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현대인들에 의해 외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는 외면당할지언정 인간의 영성이 사라지거나 무시되는 일은 없다. 영성이 감성이나 이성과 더불어 인간 본성의 일면인 한, 현대인이라고 해서 영성을 외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오히려 종교의 전통과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짐에 따라 다종교적 영성, 초종교적 영성, 또는 비종교적 영성을 키울 수 있는 공전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종교 간의 벽을 넘고 종교와 비종교의 구별마저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을 회복하고 실현할 수 있는 초유의 기회를 누리게 된 것이다.

현대인들은 제도 종교들이 더 이상 인간의 의식을 지배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영적 공허 속에 방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영적 실험을 하면서 이전 시대의 인간들이 누려보지 못했던 영적 자유와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종교를 넘어 영성으로, 한 종교에 갇혔던 시야를 벗어나 인류 전체의 영적 자산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현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나는 이것을 ‘제삼의 영적 세계’라고 부르고 싶다. 한 종교의 언어와 전통에 사로잡혀 절대화하지 않는 영성,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세속주의도 아닌 영성, 나아가서 종교와 비종교 - 성과 속, 진과 속 - 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비종교적 영성이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서구 사회들의 경우 이러한 초종교 영성은 동양 종교들에 대한 관심 혹은 환경/생태적 영성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서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대형 서점의 종교 서적 코너를 한 번 방문해 보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동양종교들에 대한 책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만큼 수요가 있기에 출간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고등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의 의식 수준은 이제 더 이상 한 종교에 묶일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단단히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갑자기 무장해제 되는 순간 영적 눈 뜨여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 지독한 종교적 배타주의의 목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린다 해도, 침묵하는 다수의 의식 속에는 종교란 결국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생각이 일반화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교들은 길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일종의 직관적 종교다원주의론을 펴기도 한다.


영적 인간관에 의하면 영성은 우리 마음 속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인간 본연의 심성이다. 인간이 인간인 한 대면해야 하고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성 그 자체에 속한다. 표피적 자아 아래 숨겨진 심층적 자아, 영적 자아, 참 자아(진아)와의 대면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겹겹으로 단단히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갑자기 무장해제 되는 순간 영적 눈이 뜨인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개안의 경험을 돈오(頓悟)라고 부른다. 선에만 돈오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유사한 영적 체험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며, 종교와 특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욕심이 만든 허상에서 벗어나 세계와 인생의 실상을 보게 되며 자기 존재의 참다운 가치를 발견한다. 소유보다 존재에, 성취보다 살아 있음에 더 큰 행복을 느끼며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되어야 할 자기와 현실적 자기, 본래적 자기와 비본래적 자기, 본질과 실존의 괴리 속에서 괴로워한다. 부처와 예수, 공자나 노자 같은 성인은 이러한 괴리와 소외를 완전히 극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터운 표피적 자아를 뚫고 들어가 영혼의 심층에 깔려 있는 깊은 자아를 만나 거기로부터 사는 진정한 사람들이다. 이 심층적 자아는 이런 저런 우연적 특성을 지닌 표피적 자아, 끊임없이 경쟁하고 갈등하는 차별적 자아가 아니라 무차별적 자아, 순수한 자아, 보편적 자아, 초월적 자아로서 만인을 품을 수 있고 만물과 하나 되는 우주적 자아이며 하느님과 하나 되는 신적 자아이다.

수행이든 은총이든 영성의 핵심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벗어나는 것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의 현실적 모습을 거부하도록 추동하는 자아로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 혹은 씨앗, 하늘로부터 품수 받은 천성, 부처의 성품, 아트만, 내면의 빛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영성의 세계에서는 하느님과의 대면은 곧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며 자기를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길이다. 영성의 완전한 실현은 하늘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인 천인합일(天人合一) 또는 신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인 신화 혹은 신인합일(神人合一)이다. 이렇게 우주와 하나 되고 신과 하나 되며 부처와 하나 되는 영성이야말로 인간의 지고선이며 존엄성의 진정한 근거이다. 그리고 영성이 인간의 본성인 한, 영성의 자각과 실현은 곧 참다운 인간이 되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일치의 경지는 죄악으로 덮여 있는 범부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비적 일치의 영성보다는 초월적 타자로부터 오는 은총에서 인간의 희망을 보는 신앙적 영성도 있다. 이른바 ‘타력’ 신앙적 영성으로서, 자신의 노력과 수행으로 자기의 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성에서 자력과 타력의 구별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영성의 세계에 ‘자력’의 오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행이든 은총이든 영성의 핵심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벗어나는 데 있다. 자기포기 없이 은총은 주어지지 않으며 은총의 도움 없이 자기초월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은총을 은총으로 깨닫는 것은 영성이며, 영성이 일깨워지는 계기는 은총으로 주어지고 영성의 완성 또한 자신의 힘보다는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참 인간’(ein wahrer Mensch)이라고 부르는 사람, 임제 선사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떤 모습의 사람일까? 욕심이 없으니 다툴 일이 없고, 소유하지 않으니 잃을 것이 없으며, 잃을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다. 성과 속, 진과 속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으며 언제나 자유롭다. 성직자들처럼 유별난 복장을 하지 않으며 특별히 근엄한 행동을 하거나 이상한 말투로 말하지도 않는다. 상식을 무시하지 않으며 권위로 자신을 포장하지도 않는다.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으며 목에 힘주는 일이 없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 물처럼 부드럽고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되 슬픔과 기쁨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많은 것을 알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부지런히 일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모든 것을 누리지만 하나도 소유하지는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영성을 사랑하는 자들이 흠모하는 참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길희성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다드는 통찰력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을,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서강대 명예교수. 한완상 박사 등과 대안교회인 새길교회를 이끌었고, 최근엔 사재를 털어 강화도에 고전을 읽고 명상을 할 수 있는 ‘도를 찾는 공부방’이란 뜻의 심도(cafe.daum.net/simdohaksa)학사를
열었다.
:

성공이란 무엇인가?

조화로운 삶 2011. 2. 23. 13:27

성공이란 무엇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로부터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알아보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하나의 다른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펀글 : http://hook.hani.co.kr/archives/22475

:

옛글

조화로운 삶 2008. 2. 13. 21:53

見善而怠 견선이태
時至而疑 시지이의
知非而處 지비이처
比三者道 비삼자도
之所止也 지소지야

그렇게 하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행하기를 주저하고
때가 왔건만 망설이다가 놓치며
나쁜일인줄 알면서도 그대로 끌려가는것
이 세가지 때문에 도는 문란해진다.












1998년에 다이어리에 적었던 글..

:

꽃섬, 라스트 파라다이스

조화로운 삶 2008. 2. 3. 20:10
 

김진혁 글, [꽃섬, 라스트 파라다이스], 들녁
_프롤로그

눈물이 날 만큼 프루고 시린 바다 위에 작은 무인도가 있다.
섬은 풍요롭다. 먹고 사는 걱정은 없다.
차가운 얼음이 들어간 커피를 마시거나,
단파 라디오를 듣는 정도에 만족한다면,
소소한 문명의 혜택도 가능하다.
해안선을 따라 두 시간 남짓 부지런히 걷는다면,
떠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올 만큼 크지 않은 외딴 섬.
이곳에 오두막을 짓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당신은 살 수 있는가?
살 수 있다면 과연 행복할까?


1. STRANGER IN PARADISE

1986년 
한 프랑스 청년이 필리핀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오랜 꿈을 찾고 있었다.
3천 개의 무인도가 있는곳.
이곳에 나만의 파라다이스를 건설한다.

1년 동안을 헤맨 끝에
그는 오랫동안 꿈꿔오던 곳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 정착했다.

17년 뒤 2003년.
그는 꿈을 이루었는가?

파라다이스는 있는가?
꽃섬.


3. 씨어리와 로즈

씨어리는 프랑스에서 행복할 수가 없었다.
씨어리는 그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_필립 (씨어리의 형)
								
나는 아주 어렸고 길을 잃은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_로즈 
								
								
								
8. 파라다이스의 조건 

파라다이스는 싸움 끝에 얻게 되는 전리품이다. 씨어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싸워서 지면 잃을 것이다. 파라다이스를 지키고 유지하는 일은 녹록하지 않다.
푸른 바다를 보며 해먹에 누워 낮잠만 잔다면 그 파라다이스는 얼마 가지 않아 빼앗기거나 도둑맞을 것이다.

...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자연은 자기가 '만든 것'이며 '그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

사랑하는 대상을 갖는 것. 그 대상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파라다이스의 조건이라고,


9. 어느날 밤에 생긴 일

씨어리는 당신의 파라다이스인가?

"그렇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럼 씨어리는 당신의 천국이면서 지옥이 될 수도 있겠네?

"당연하다. Of Course!"
					_로즈
								
								
10. 파라다이스는 있는가?

"이 세상에 파라다이스는 없다. 그것은 이미지일 뿐이다. 파라다이스라는 이미지."

그렇다면 꽃섬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난 단지 여기 잘 왔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꽃섬에서 당신이 느끼는 즐거움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Freedom다. 그리고 자유로움으로 인한 행복!"
:

고독과 고립

조화로운 삶 2008. 1. 31. 21:25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홀로 왔고 살 만큼 살다가 떠날 때도 홀로 간다.
가까운 사람끼리 함께 어울려 살면서도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사람의 얼굴이 각기 다르듯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독신 수행자는 주어진 여건 자체가 홀로이기를 원한다.
한곳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도 저마다 은자처럼 살아간다.
무엇보다도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
묶여 있지 않는 들짐승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숲 을 다니듯, 독립과 자유를 찾아 혼자서 간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절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만났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리니 기쁜 마음으로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그와 같은 동반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어차피 저마다 자기 식대로 사는 게 인생이다.
똑같이 살라는 법은 없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을 때 전체인 자기의 있음이고,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그는 부분적인 자기다.

우리 시대의 영적인 스승 크니슈나무르티도 일찍이 말했다.

‘홀로’라는 낱말 자체는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당신이 홀로일 때 비로소 세상에 살면서도 늘 아웃사이더로 있으리라.
홀로 있을 때 완벽한 생동과 협동이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단지 혼자 지낸다고 해서 과연 ‘홀로 있음’인가.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는 가르침은 홀로 있음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킨다.
즉, 개체의 사회성을 말한다.

모든 것은 서로 이어져 있다.
바위 위에 외롭게 떠 있는 섬도 뿌리는 대지에 이어져 있듯.

고독과 고립은 전혀 다르다.
고독은 옆구리께로 스쳐 지나가는 시장기 같은 것, 그리고 고립은 수인처럼 갇혀 있는 상태다.
고독은 때론 사람을 맑고 투명하게 하지만, 고립은 그 출구가 없는 단절이다.

다코타 족 인디언 오히예사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는 홀로 있을 때 우리와 더 가까이 있다.
홀로 있음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절대 존대와 대화하는 일이 인디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예배다.
자주 자연 속에 들어가 혼자 지내본 사람이라면 홀로 있음 속에는 나날이 커져가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삶의 본질과 맞닿는 즐거움이다.”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되어간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그 인생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便프?않는다.
즐거움은 밖에서 누가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거치면서 고마움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부분적인 자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기일 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력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나온다.
여기 비로소 홀로 사는 즐거움이 움튼다.

‘누가 홀로 가는가?’

‘태양, 태양이 홀로 간다.’

인도의 가장 오래된 「베다」 경전에 나오는 문답이다.

내가 소싯적부터 즐겨 외는 청마 선생의 ‘심산 深山’이란 시가 있다.



심심 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 법정스님 신작 에세이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2004.09)
:

불우한 자들이 낙원을 만들고 모든 낙원은 지옥속의 낙원이다

조화로운 삶 2008. 1. 31. 21:24
라인홀트 매스너는 유럽 알피니즘의 거장이다. 그는 히말라야에 몸을 갈아서 없는 길을 헤치고 나갔다.
그는 늘 혼자서 갔다. 낭가파르바트의 8.000미터 연봉들을 그는 대원 없이 혼자서 넘어왔다.
홀로 떠나기 전날 밤, 그는 호텔 방에서 장비를 점검하면서 울었다. 그는 무서워서 울었다.
그의 두려움은 추락이나 실종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에 슬픔이 섞여있는 한 그는 산속 어디에선가 죽을것이었다. 길은 어디에도 없다.
앞쪽으로는 진로가 없고 뒤쪽으로는 퇴로가 없다. 길은 다만 밀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그는 산으로 가는 단독자의 내면을 완성한다. 그는 외로움에서 슬픔을 제거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외로움의 크고 어두운 산맥을 키워나가는 힘으로 히말라야를 혼자서 넘어가고
낭가파르바트 북벽의 일몰을 혼자서 바라본다.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때는 울면서 철수했다.

퇴계는 평생을 산이 가까운 고향마을에서 살았다. 산 가까이 살기 위하여 그는 무려 40여 차례나 임금에게
사직서를 보냈다. 퇴계는 안동의 청량산을 즐겨 찾았고 멀리 갈 때는 풍기의 소백산까지 다녔다.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산수의 의미를 가르쳤는데 한 번 산행에 며칠씩 걸렸다. 퇴계는 도피와 일탈로서의
산행을 나무랐다. 산속에서 '청학동'을 묻는 자들의 몽환을 퇴계는 꾸짖었다. 산에 가서 '안개와 노을을
마시고 햇빛을 먹으려는 자들'을 퇴계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산에 속아넘어가서 결국 자신을 속이게 되는
인간들을 퇴계는 가엾게 여겼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다'라는 것이 산에 처하는 퇴계의 마음이다.
산이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그 정화된 마음으로 다시 현실을 정화시킬 수 있을 때 산은 아름답다.
산에 관한 퇴계의 글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퇴계의 산은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구현되어야 할
조화의 산이다.

우리는 매스너의 길을 따라서 산에 오를 수도 없고 한산자나 도가의 길을 따라서 산에 오를 수도 없다.
매스너를 따라가자니 외로움과 싸울 일이 두렵고, 한산자를 따라가자니 몽환의 열정이 모자라기도 하고
우선 생활이 발목을 잡는다. 아마도 우리는 퇴계의 멀고 먼 뒤를 따라서 겨우 산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퇴계의 산행은, 돌아서서 산과 함께, 산을 데리고 마을로 내려오기 위한 산행이고 인간의 마을을 새롭게
하기 위한 산행이다. 마음속으로 산을 품고 내려오려 해도 산은 좀처럼 따로오지 않는다. 휴일의 날이
저물고 사람들 틈에 섞여 산을 내려올 때, 성인은 벌써 산을 다 내려가서 마을에 계신다.

천하에 무릉도원은 없다.


김훈, [자전거 여행] 중에서


(2004.09)
:

Life is (인생이란)

조화로운 삶 2008. 1. 31. 21:19
Imagine life as a game in which you are juggling five balls in the air.

(인생이란 5개의 공을 저글링하는 게임이라고 생각해보세요.)


You name them: work, family, health, friends, and spirit, and you're keeping all of them in the air.

(이름하야: 직장, 가정, 건강, 우정, 그리고 정신(종교), 그리고 이것들을 동시에 공중에 던져 떨어뜨리지 않게 논다고 생각해보세요.)


You will soon understand that work is a rubber ball.

(그러면 여러분은 직장 혹은 일이라는 것이 고무공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If you drop it, it will bounce back.

(만약 떨어뜨린다 해도 다시 튀겨서 올라오죠.)


But the other four balls - family, health, friends, and spirit are made of glass.

(그러나 다른 4가지-가정과 건강과 우정과 정신은 유리로 만들어진 공입니다.)


If you drop one of these, they will be irrevocably scuffed, marked, nicked, damaged, or even shattered.

(만약 이것들을 떨어뜨린다면 그 공들은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흠집이 생기거나, 금이 가거나, 깨지거나, 어쩌면 아예 산산조각이 날지도 모릅니다.)


They will never be the same.(다시는 똑같아 질 수가 없지요.)

You must understand that and strive for balance in your life.


(여러분들은 반드시 그것을 이해하고, 인생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How?

(그렇다면 그 방법은?)



* Don't undermine your worth by comparing yourself with others.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함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마십시요.)


It is because we are different that each of us is special.

(왜냐하면 우리 개개인이 모두 차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특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Don't set your goals by what other people deem important.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것으로 자신의 목표를 정하지 마십시요.)


Only you know what is best for you.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 Don't take for granted the things closest to your heart.

(늘 자신의 마음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이라고 당연히 받아야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Cling to them as your life, for without them, life is meaningless.

(그런 것들을 목숨처럼 소중히 하세요. 그런 것들이 없어지면 인생 자체도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 Don't let life slip through your fingers by living in the past or for the future.

(과거나 미래에 연연함으로서 인생 자체가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By living your life one day at a time, you live ALL the days of your life.

(하루, 하루를 소중히 살아감으로서, 인생의 모든 날들은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 Don't give up when you still have something to give. Nothing is really over until the moment you stop trying

(아직도 뭔가 여력이 있고,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시도를 포기하는 순간까지는 끝이란 없는 법입니다.).


* Don't be afraid to admit that you are less than perfect.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두려워하지 마세요.)


It is this fragile thread that binds us together.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바로 그 가느다랗고 완벽하지 못한 존재니까요. )


* Don't be afraid to encounter risks.

(모험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It is by taking chances that we learn to be brave.

(용감해지려면 기회를 과감히 선택해야 합니다.)


* Don't shut love out of your life by saying it's impossible to find.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는 이유로 사랑을 인생에서 쫓아내려 하지 마세요.)


The quickest way to receive love is to give.

(사랑을 받는 가장 빠른 길은 사랑을 주는 겁니다.)


The fastest way to lose love is to hold it too tightly.

(사랑을 잃는 가장 빠른 길은 그것을 너무 꽉 쥐고 있는 거죠.)


And the best way to keep love is to give it wings.

(그리고 사랑을 보존하는 가장 좋은 길은 그것에 날개를 달아주는 겁니다.)


* Don't run through life so fast that you forget not only where you've been, but also where you are going.

(인생을 너무 빠르게 질주하지 마세요. 그렇게되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조차 잊게됩니다.)


* Don't forget that a person's greatest emotional need is to feel appreciated.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감정은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요.)


* Don't use time or words carelessly.

(시간과 말을 부주의하게 사용하지 마세요.)


Neither can be retrieved.

(두 가지다 복구가 불가능하거든요.)


Life is not a race, but a journey to be savored each step of the way.

(인생은 쾌속 경주가 아니라, 한 계단, 한 계단을 음미하며 가는 긴 여행입니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and today is a gift that's why we call it - the Present...

(어제는 역사 속에 묻히고 , 내일은 기약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선물입니다. 그래서 바로 현재를 Present(선물)이라고 불리는거죠.)


Pres, COO of Coca-Cola Company

Douglas Daft

(코카콜라사 회장 더글라스 대프트)

(2004.05)
:

Find your center, Like a Dharma Toy

조화로운 삶 2008. 1. 31. 21:09
                                                    Berkeley, California
                                                    October 21, 1977
Dear Soen Sa Nim,
I hope you are well. Thank you for the good kido. I got lots of energy from it.
I have been doing the Kwan Seum Bosal mantra. I try to do it whenever I'm not doing
anything else with my mind. But still, there is a lot of small I, many thoughts.
All this thinking makes me unhappy. So, when I went to see Diana, I said, "I am depressed."
So, for an hour, we did therapy. Then, at the end of the hour, Diana said, "Do more Kwan
Seum Bosal, and come stay at the Zen center." So, I am going to move into the Zen center
as soon as I can find someone to sublet my place. I am sure this together-action will be
very good for me.
                                                      Love,
                                                      Maggie




                                                      November 7, 1977
Dear Maggie,
Thank you for your letter. How are you and the Berkeley Empty Gate Zen Center family?
I'm glad you liked the kido.
You say you are doing Kwan Seum Bosal whenever you are not doing anything else
with your mind. This is not good, not bad. I ask you: where is your center? That is
most important . If you don't lose your center, then any action is no problem. Also,
how strong is your center? I tell you, when your are doing something, do it. When you
are doing something 100 percent, this is your center; this is clear mind. But be very
careful. If you keep your ideas, your condition, or your situation, you will lose your
center to any action you are doing

...


Zen Master SEUNG SAHN, [Only Don't Know]

(2004.03)
:

Interview with GOD (신과의 인터뷰)

조화로운 삶 2008. 1. 31. 21:08
Interview with GOD
신과의 인터뷰



... I dreamed I had an interview with GOD
신과 인터뷰하는 꿈을 꿨다.



"so you would like to interview me?" GOD asked.
그래서 날 인터뷰하고 싶나? 신이 물었다.
"If you have the time," I said.
시간 있으시다면요. 내가 말했다.

GOD smiled.
신은 미소를 지었다.
"My time is eternity... what questions do you have in mind for me?"
내 시간은 영원하다네. 어떤 질문을 하고 싶은 건가?



"What surprises you most about humankind?"
당신은 인류에 대해 어떤 점이 가장 놀랍습니까?
GOD answered
신이 대답했다.



"That they get bored with childhood, they rush to grow up,
and then long to be children again."
인간은 어린시절을 지겨워해서 빨리 어른이 되지.
그리고는 다시 아이가 되고 싶어하지.

"That they lose their health to make money...
and then lose their money to restore their health."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고는
나중에 그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돈을 잃더군.

"That by thinking anxiously about the future, they forget the present,
such that they live in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미래에 대해 걱정하면서 현재를 잊고
결국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지.

"That they live as if they will never die,
and die as though they had never lived."
인간은 그들이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결코 살았던 것 같지 않게 죽어버리더군.



GOD's hand took mine and we were silent for a while.
And then I asked,
신은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내가 물었다.

"As a parent, what are some of life's lessons
you want your children to learn?"
부모로써, 아이들이 배웠으면 하는 인생의 교훈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To learn they cannot make anyone love them.
All they can do is let themselves be loved."
누군가가 그들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없지만
그들 자신이 사랑받게 할 수는 있다는 것을 배우게 하고 싶네.

"To learn that it is not good to compare themselves to others."
그들 자신을 다른이들과 비교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하고 싶네.

"To learn to forgive by praticing forgiveness."
용서하는 것을 연습함으로써 용서하는 것을 배우게 하고,

"To learn that it only takes a few seconds to open profound wounds in those they love. and it can take many years to heal them."
그들이 사랑하는 것에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데는 몇초밖에 안걸리지만 그들을 치료하는데는 많은 세월이 걸린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네.

"To learn that a rich person is not one who has the most,
but is one who needs the least."
부자들이란 가장 많이 가진 자가 아닌, 가장 적게 필요한 자라는 것을 배우게 하고 싶네.



"To learn that there are people who love them dearly,
but simply do not yet know how to express or show their feelings."
세상에는 그들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단지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

"To learn that two people can look at the same thing and see it differently."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네.

"To learn that it is not enough that they forgive one another,
but they must also forgive themselves."
그들이 서로를 용서할 뿐 아니라 그들 자신 역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하고 싶네.



"thank you for your time," I said humbly.
시간을 내주셔 감사합니다, 나는 겸손해져서 말했다.

"Is there anything else you'd like your children to know?"
아이들이 배우길 바라는 다른 것은 없나요?



GOD smiled and said...
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Just know that I am here."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Always."
언제나.
"All ways."
어떤 방식으로도.


(20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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