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하는 일에 이유가 있을까

관심기사 2008. 7. 19. 21:35
원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9590.html

마음이 하는 일에 이유가 있을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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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영화 인문 /

⑤ 김지운<달콤한 인생>(2006): ‘진짜 이유가 뭐죠?’

1. 내가 가까운 학생들을 훈련시킬 때에 지키며 되새기도록 권하는 지침 중의 하나는 ‘네 마음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지침은 ‘고백과 소문은 반칙’이라거나 ‘생각은 공부가 아니’라는 등의 지침들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 지침에 견결하기만 해도 참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지요. 요체는 ‘탈심리주의적 태도’인데, 신뢰는 결코 심리의 바다 속에서 건져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의 보스와 선우의 경우처럼, 호감이 관계를 구원할 수 없는 곳, 바로 그곳이 우리의 세속입니다. 2. 다음은 윤종빈의 <용서받지 못한 자>(2005)입니다.


선우는 왜 보스를 배신했을까? 보스는 왜 선우를 죽이려 했을까? ‘진짜 이유’는 아무도 그 진짜 이유를 모른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이유란 영영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이며 인문의 촉수인 것. 보스와 선우의 죽음은 인과를 따져야 할 건달들이 이유를 따지고 헤아린 죄, 그것이 죄라면 죄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은 나뭇가지나 바람이 움직이는 것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그랬다면 그것은 ‘원인’을 캐고 제거하는 스릴러물로 낙착되고 말았을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 대사 중에서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라는 스승의 말 속에서, 문제는 원인이 아니라 이유이며 영화의 취지는 사실의 확정이 아니라 인문(人紋)의 탐색이라는 점을 짐작게 한다.

“그런 거 말고 … 진짜 이유가 뭐야?” 보스는 선우에게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캐묻는다. 단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조직에 충성했기에 아내에게 못하는 말조차 털어놓을 만큼 믿었고, 사랑에 무심한 듯했기에 자신의 애인마저 맡겼던 그가 흔들린 것이다. 보스는 과거의 선우를 일깨우며 다그친다. “너, 그런 놈이 아니잖아!” 물론 보스의 믿음은 원인-결과로 확인되는 부하의 객관적 충실도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 객관성을 비집고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부하의 주관성은 단지 배신의 시늉이 아니다. 말하자면, 보스는 그가 조직의 세계에서 ‘돌이킬 수 없이’(이것은 이 영화의 채택되지 못한 제목이기도 했다) 어긋난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직감했던 것이다. 사과의 맛을 본 아담이 돌이킬 수 없이 낙원에서 멀어진 것처럼, 소크라테스를 만난 플라톤이, 혹은 예수를 만난 바울이 돌이킬 수 없이 변해간 것처럼, 그 여자의 어떤 이미지를 접한 그는 이미 객관성(인과의 충실성) 속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조직의 단말기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보스의 과도한 반응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선우는 늘 자신의 소임을 오차 없이 수행하는 해결사로서 ‘체계의 노동’에 완벽했지만, 스쳐 지나가야만 했던 그 여자의 인상에 밟힌 그는 실없는 ‘정서의 노동’을 자임하며 보스의 체계와 치명적으로 대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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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유가 뭐죠?” 죽음의 문턱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선우는 총을 들고 보스와 마주 선다. 그리고 건달답지 않게 무엇보다도 이유를 궁금해한다. 자신을 죽여야 하는 원인이 아니라 이유, 그것도 ‘진짜 이유’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그는 7년 동안이나 보스를 위해 개처럼 일해 온 자신을 그처럼 쉽게 죽이려 했던 ‘이유’에 절박하게 매달린다. 그러나 조직이라는 체계 속에서 쓸모 있는 질문의 방식은 ‘이유’가 아니라 오직 ‘원인’일 뿐이다. 인과가 아니라 이유를 묻는 사이는 이미 명령-복종의 체계를 벗어난다. 이유는 인문(人紋)의 촉수이며, 그것은 조직적 체계가 부리는 인과의 그물망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 거 말고 … 진짜 이유가 뭐야?”라고 물었던 보스에게 그가 그 ‘진짜 이유’를 대지 못한 것처럼 “진짜 이유가 뭐죠?”라고 묻던 그에게 보스도 그 ‘진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선우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대답하지만 그것은 그가 추정한 원인-결과였지 보스가 요구한 ‘이유’가 아니었다.

보스와 선우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 궁금증 속에서 불구적으로 대치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결국 그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상대를 죽이려 들고 또 상대를 죽이고야 만다. 애매함은 더러 매혹적이고, 그 매혹은 더러 치명적이다. ‘이유 없는 반항’이자 ‘이유 없는 처벌’이라는 점에서 이 조폭영화는 실존적인 울림을 얻고, 원인과 결과라는 선형적(線形的) 조직이 수용할 수 없는 잉여의 부분 속에서 인문의 결마저 생긴다. 실은 이유라는 것은 영영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이며, 그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한 쉼없는 재서술의 과정이 곧 인문학의 내적 동력이기도 하다.

<달콤한 인생>의 한 측면은 ‘체계의 노동’과 ‘정서의 노동’이 상충하는 지점을 매우 섬세하게 드러낸다. 보스의 오른팔이었던 선우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처벌받는 것은, 체계의 노동만으로 자신을 증명해 왔던 그의 인생 속으로 달콤한 정서를 인입한 탓이다. “표정 속에 욕망이 드러나는 조직의 3인자 문석(김뢰하)은 시험받지 않지만 욕망에 초연해 보이는 선우만이 체계의 알리바이가 되어 줄 희생양으로 지목”(김현수)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서는 못 박듯이 서술될 수 있는 게 아니며, 더구나 조직은 정서의 노동을 체계적으로 배제함으로써만 자신의 체계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자신의 애인을 감시하고 필요한 경우 처리하라는 보스의 명령은 엄밀히 ‘체계의 노동’이었다. 그렇기에 보스는 일견 연정에 초연한 듯한 그를 택했을 것이다. 그 역시 그것을 체계의 노동으로 이해하고 수행하지만, 무심결에 간취한 그 여인의 이미지는 예기치 않게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인생은, 참, 그런 식으로만 달콤한 것!)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고, 선우는 그의 보스와 분명한 이유 없이 대치한다. 그 와중에 그는 돌이킬 수 없이 보스의 체계와 멀어지면서 그 여인으로 인한 ‘정서의 노동’을 자임한다. 지멜이나 기든스(A. Giddens) 등의 사회학자들은 산업사회의 체계 지향적 남자들이 여자들의 공동체 지향적 정서 노동 속에서 휴식과 구원의 기운을 찾는다고들 지적하지만, 하필 그 여자가 보스의 애인이었으니 그 대가는 응당 치명적이었던 것.

사안을 더 근본적으로 살피자면, 보스와 그의 치명적인 대결은 인과를 따져야 할 건달들이 ‘이유’의 와류 속에 휘말린 죄로 소급된다. 한갓 건달들이 이유를 따지고 헤아린 죄? 이것이 죄라면 참으로 이상한 죄다. ‘이유’는 워낙 문사들의 화제(話題)이면서, 펜으로써 쉼 없이 재서술해야 할 대상이지, 칼과 총을 사용하는 이들이 다룰 수 있는 타깃이 못 된다. 펜으로써 원인을 헤아리는 짓이 대개 졸루하다면, 총칼로써 이유를 따지는 짓은 이처럼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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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보스와 선우가 동시에 알고자 한 ‘진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진짜 이유가 뭐야?”라며 그를 죽이려 했고, “진짜 이유가 뭐죠?”라며 보스를 죽이려 했던 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속의 내레이션이 시사하듯, 보스의 여인을 두고 한순간 품은 ‘이루어질 수 없는 달콤한 꿈’이었을까? 그러나 화해할 수 없이 충돌하는 그 치명성은 그처럼 하나의 은폐된 이유로 수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너무나 사소한 것이기에 충돌은 금세 그 동력을 잃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외려 진짜 이유는 ‘아무도 그 진짜 이유를 모른다는 바로 그 사실’, 혹은 ‘아무도 진짜 이유를 진짜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둘 사이의 치명성은 바로 그 무지(에의 의지)에서 발원한다. 보스와 그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진짜 이유’로 상대방을 죽이는 게 아니다. 상대를 죽일 수 있는 힘은 오히려 ‘진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며, 그것을 강박적으로 찾으려는 애착 속에서 오히려 그 진짜 이유를 밀어낸다는 것이다.

김영민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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